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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2] 극동건설그룹


코웨이의 재매각 뉴스를 기념으로... 


웅진그룹 해체의 장본인인 극동건설의 발자취를 찾아보았다. 


근 60년 넘게 역사를 이어온 기업이지만, 그만큼 파도가 많았던 기업... 






[2] 극동건설그룹 




1. 시작. 


1947년 4월 김용산 회장이 대영건설 창업. 


1953년 4월 상호 변경, [극동건설] 


전후 황폐화된 대한민국에서 건설업에서 기회를 찾은 기업들이 대거 탄생하기 시작함. 


본 포스팅의 극동건설이나 남광토건, 현대그룹, 동아그룹 등이 그러함. 





2. 호텔 사업. 


1960년대 해운대에 극동호텔을 건설함. (1965년 완공) 


1967년 경영난으로 동아대학교 재단에 극동호텔 매각함. 


1976년 충무로에 호텔 대연각을 건설함. (1969년 완공) 


대연각은 창업주이자 회장인 김용산 회장 개인 자산이라는 사실이 매우 주목을 받는 사항이었음. 


1971년 12월 25일 대연각 호텔 화재 사건 발생함. 


당시 화재 사건은 168명의 사망자를 낸 사건으로 극동건설의 존립에 위협을 주는 사건이었음. 











3. 중동 건설 붐 


70년대의 중동은 건설사의 해외 진출에 큰 이익을 안겨주던 시기. 오일쇼크를 통해 발생한 유가 급등으로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인 중동의 산유국들은 SOC 사업을 대거 펼치기 시작함. 


70년대 초에 해외 수주액이 1억 7천만 달러였던 것이, 80년대 초에 136억 달러로 늘어나게 됨. 


이 과정에서 현대건설, 대림산업, 동아, 삼환, 대우 등 많은 건설사들이 수혜를 받음. 








하지만 80년대 들어서 중동 국가들의 발주 물량이 줄어들기 시작함. 


이 과정에서 악성 미수금이 발생하여 도산하는 건설사들이 발생하기 시작함. 


이 과정에서 극동건설의 도급 순위가 점차 하락하기 시작함. 


업계 1티어(현대, 동아, 대우 등)가 도급 한도액이 2~2.7조원임에 반해, 극동건설은 4천억원 수준이었음. 








4. 국제그룹 자산 인수. 


1985년 국제그룹 해체. 







1986년 국제상사의 건설 부문 인수, 동서증권 인수. 


국제상사의 건설부문은 국제종합건설이 되었고, 동서증권을 통해 금융업에도 진출하게 됨. 


국제상사의 도급 순위는 9위를 차지하고 있었음. 


하지만 국제그룹 건설부문이 중동붐 당시에 중동지역 사업에 크게 기대고 있었음. 그렇기에 중동건설 당시의 부실채권이 그대로 있었기에 경영이 악화된 채로 이어짐. 


국제그룹 건설 부문 인수 당시에 발생한 손실은 2800억 이상이었음. 


극동건설의 도급순위는 계속해서 밀려나게 됨. 


 




5. 금융업 진출. 


1986년 국제상사의 건설 부문 인수, 동서증권 인수. 

1988년 동서투자자문 설립. 

1990년 동서 창투 설립. 

1994년 동서 할부 금융 설립. 

1996년 동서투자신탁 설립. 


극동건설의 금융 비지니스의 자산규모는 2조 7백억원이었으며, 주식 약정 규모로는 업계 4위를 차지함. 


전국에 83개의 지점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해외에도 지점을 설립하여 진출하였음. 












6. 붕괴의 조짐. 


국제 그룹에서는 건설부문과 금융부문을 인수하였다. 


인수 당시만 하더라도 국제그룹의 건설 비지니스는 극동건설보다 도급 순위가 높았기에 시너지가 발생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생각 이상으로 부실이 심각하였음. 


인수 직후에 발생한 손실이 2800억원이었으나, 이후에는 3600억원 이상으로 늘어나게됨. 이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수치였기에 부실규모는 더욱 컸을 것으로 추정. 


1997년 극동건설은 계열사인 동서증권으로부터 회사채지급보증으로 1천억원을 지원받았으며, 어음보증등을 통해 추가로 1400억원을 추가로 지원받음. (2,400억) 


1994~1997년 동안 분식회계를 저지르면서 해당 기간동안 극동건설이 흑자를 유지한 것처럼 보이게 했음. 이러한 가라 밸런스시트를 통해 해외로부터 1200억원 상당의 채권을 발행하여 자금 조달을 하였고, 계열사들을 지원했음. 


또한 동서증권은 해외 투자의 실패로 손실이 이어지기 시작함. 


1995년 이후로 동서증권은 연속하여 영업 손실을 기록하기 시작. 






7. IMF 


동남아 외환위기로 시작하여 한국에 도달한 외환위기는 극동건설에게 있어서 재앙으로 다가옴. 


외환위기로 인해 증시 폭락이 발생했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극동건설이 보유한 자산가치는 휴지조각이 되기 시작함. 


1995년 3월 동서증권 부채 9850억원. 

1995년 9월 동서증권 부채 1조 4천억원. 


금융부문에서 자산가치가 하루하루 폭락해 가는 중에, 극동그룹 전체에 경영 위기썰이 퍼지기 시작함. 


결국 동서증권을 매각하기로 결정함. 결정 당일에 동서증권은 뱅크런이 발생함. 당일에만 7백억원의 예탁금이 인출됨. 









건설부문 또한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했음. 


1996년 인도네시아의 건설 비지니스에서 300억원대의 적자를 기록함. 금융 비지니스의 손실과 합산할 경우 700억원 규모의 적자가 발생함. 






8. 그룹 해체. 


극동그룹은 극동건설을 포함한 9개의 계열사를 매각하는 방침을 보도함. 


1600억원에 달하던 극동빌딩과 계열사들을 포함하여 대략 6천억원의 유동성을 확보하는 플랜을 세웠음. 


그러나 동서증권의 매각과 동시에 발생한 뱅크런 사태는 일련의 매각 플랜을 모두 망가뜨리는 트리거가 됨. 


먼저 동서증권이 부도처리 되는 것을 시작으로 그룹 전체가 해체의 길을 밟기 시작. 


1998년 3월 워크아웃이 됨. 









9. 법정관리. 


법정관리에 들어간 극동건설은 고강도 구조조정을 겪게됨. 


피를 토하는 노오력을 통해 6년만에 법정관리를 졸업하게됨. (2003년) 


그리고 새로운 아버지를 맞이하게 되는데.... 






10. 론스타 강점기. 

2003년 론스타, 1700억원에 극동건설 인수. 

대부분의 주식을 인수하여 자진상폐를 하여 비상장 기업이 됨. 

이후 론스타는 영업이익 이상으로 배당을 받아옴. 인수금액 이상인 2천억원 이상을 배당으로 수취함. 

론스타는 4년 동안 돈될만한 자산은 모두 매각했으며, 이는 모두 배당이나 유상감자등을 통해 모조리 회수했음. 

사실상 껍데기만 남은 기업이됨. 

론스타는 외환위기를 기회로 외환은행, 빌딩, 각종 기업등에서 상당한 시세차익을 거두었음. 

특히 외환은행의 경우 2조원 초반대로 인수하여, 4조원에 하나금융그룹에 매각을 함. 배당이나 기타 이익등을 고려하면 총 6조원이 넘는 이익을 수취함. 7년 동안 4조원 이상의 순이익을 남긴 것임. 











11. 웅진그룹. 


2007년 웅진그룹, 극동건설 인수. 


웅진그룹은 그룹의 사세를 한단계 점프하기 위해 건설사 진출을 희망하였음. 


식품이나 렌탈 비지니스, 교육등을 통해 연매출 2조 3천억원을 기록했고, 여기에 추가로 건설 비지니스를 추가하여 매출액을 한단계 더 올리기를 원했음. 


인수 직전의 극동건설의 손익은, 


매출액 5,200억, 영업이익 361억, 당기 순이익 302억원을 기록했음. 


1700억원에 인수했던 론스타는, 웅진그룹에 6600억원에 매각함. (PE 기준 22배) 


극동건설을 통해 론스타가 얻은 이익은 배당으로 2,200억원, 매각으로 6,600억원, 총 8,800억원의 이익을 억음. 순이익은 약 7,700억원 상당이었음. 


07년도 매각 당시의 극동건설의 기업가치는 약 1,300억원 수준이었다고 함. 


당시 극동건설 인수전에 뛰어든 흑우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음. 


대한전선, STX, 효성, 유진그룹, 한화, 동양.... 


놀랍게도 인수전에 참여한 흑우들의 절반이 법정관리 행을 밟고, 증시에서 영영 사라지게 됨. 









 웅진 - 그룹 워크아웃, 그룹 해체 


 대한전선 - 법정관리 


 STX - 워크아웃 및 그룹 해체 


 효성 - 조석래 회장 차명계좌, 탈세 등 각종 혐의로 기소 


 동양 - 기업 해체 


 유진 - 회장 검사에게 금품 향응 등 뇌물 혐의로 집행유예 선고 


 한화 - 김승연 회장 배임혐의로 기소 



론스타 : 아따 말랑카우들 왔능가? 흑우들 보소 ㅋㅋㅋㅋ 




여하튼 웅진그룹은 뒤늦게 눈탱이를 맞았음을 직감했으나, 이미 버스는 떠난 이후고... 


극동건설 인수 이후, 웅진그룹은 코웨이(렌탈 비지니스), 씽크빅(교육), 식품, 건설 등 7개의 계열사를 보유하게 됨. 


재계 30위에 오르기도 함. 










이후 2008년이 다가오게 되는데.... 





12. 2차 법정관리.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 리만브라더스 사태가 발생하게 되면서 금융위기가 도래하게 됨. 


08년 금융위기는 귀신같이 부동산 시장을 얼려놓게 됨. 


당시 웅진그룹은 다양한 사업 다악화를 걷고 있었음. 


새롭게 인수한 건설은 물론이고, 동양제철화학(OCI)가 태양광 폴리실리콘으로 꿀빨고 있는게 부러웠던지 폴리실리콘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치킨게임에 호되게 쳐맞음. 


2012년도에는 극동건설이나 웅진에너지 등의 차입금을 메우기 위해 코웨이등의 알짜 기업들을 매각하는 수순을 밟기 시작함. 













하지만, 코웨이 매각은 몇달째 입찰단계만 걸치며 시간만 흘러감. 


2012년 8월 결국 MBK파트너스에 웅진코웨이 주식 30%를 1조 2천억에 매각하는 것으로 계약함. 


하지만 극동건설 등 계열사들의 차입금 상환시기가 더 빠르게 찾아왔다는, 웅진그룹의 변명아닌 변명과 함께 웅진그룹이 법정관리에 들어감. 


법정관리에 들어가기 직전에 오너일가와 임원들은 웅진홀딩스, 코웨이의 주식을 팔아서 씽크빅의 주식을 사들이는 부도덕한 행위들을 저지름. 


MBK파트너스 입장에서는 매각 협상이 계약에 이르렀음에도 법정관리를 신청했으니 통수중의 통수였음. 


웅진의 윤회장 등 오너일가의 속셈은 웅진그룹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코웨이를 매각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희망했기 때문임. 


결국 코웨이 매각 문제를 두고 mbk와 웅진그룹, 채권단 등과 함께 법정싸움에 들어갔고, 우여곡절 끝에 MBK가 코웨이를 인수하게 됨. 


이후에 웅진그룹은 6년 이후 씽크빅을 통해 다시금 코웨이를 인수하였으나,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시장에 내뱉는 기행을 펼침. 










한편 코웨이 매각, 매각 철회 쇼를 펼치는 사이, 이 과정에서 결국 극동건설의 상태는 더욱 악화됨. 


98년도의 1차 법정관리 이후, 2012년에 2차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됨. 













결국 2013년 웅진그룹에서 분리됨. 


2차 법정관리는 18개월만에 졸업하게 됨. 






13. ING


2014년에 2차 법정관리를 졸업했으나, 여러차례 매각을 실패를 겪었고 2016년 세운건설에 인수됨. 










세운그룹의 지배구조는, 


세운 건설 → 극동건설 → 세운산업개발 → 극동케미칼의 구조로 이어지고 있음. 


극동건설은 2018년 매출액 1978억, 영업이익 19억, 당기 순이익 40억을 기록하면서 흑자전환 하였음. 


세운건설은 극동건설을 통해 신사업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사업 전략을 진행중이다.... 







14. FIN






창업주인 김용산 전 회장은 2007년 8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리즈 시절이던 1987년에는 재계 순위 20위를 기록하는등, 


70년대에는 현대, 동아, 대림, 삼부, 극동 건설 탑5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김용산 전 회장의 말년에는 그룹 해체와 외환위기 시절의 분식회계 등의 범죄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잘못된 인수합병, 


거시적인 경제 흐름을 읽지 못한것,


사업 다악화를 펼쳤기 때문, 


이유야 수 없이 많겠지만 결국 막대한 부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게 되었다.  


인생....